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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위해 모든 기득권 버린 '10대 부자' 집안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③] 이회영 생가터와 우당기념관


[오마이뉴스 글:홍윤호, 편집:홍현진]


1932년 11월 초, 중국 상하이를 떠난 영국 선적 남창호가 만주 다롄에 들어가고 있었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평범한 여객선이었다. 갑자기 일본 경비선 두 척이 속도를 내며 달려와 배를 멈출 것을 강요하고, 일본 경찰이 선내에 서둘러 진입하였다. 총을 든 채였다.
        

경찰들은 바로 배 가장 밑바닥의 4등 선실로 들어가 살기등등 해서 누군가를 찾았고, 곧 그들은 중국인 복장을 한 60대 노인 한 명을 체포했다.


"다 알고 왔다! 가자!"


노인은 체념하고 순순히 따라갔다.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듯한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칠 수도, 그럴 수단도 없었다.

다롄경찰서로 압송된 그는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64세 나이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악독한 고문을 당했다. 불에 달군 쇠가 살점을 파고 들고, 온몸에 매를 맞으며 허리가 부러졌다. 그러면서도 자백을 거부한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죽음을 맞았다.


다음 날 경찰은 그가 유치장 안에서 자결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만주 군벌인 장쉐량과 연결해 무기를 공급받아 일제에 항전할 지하조직을 만들고, 만주 침략의 선봉장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할 계획을 갖고 64세 나이에 만주행 배를 탄 인물. 청년 동지들을 희생시키느니 자기가 직접 가서 거사를 결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단행한 만주행은 그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안내했다.


나중에 그의 아들 이규창과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연맹은 그의 거동에 대한 비밀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밀정 세 사람을 찾아내서 처단한다. 밀정 중에는 그의 조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동지들의 선봉이 되겠다며 죽음의 길을 자청한 노인, 그의 이름은 이회영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유교 사대부 집안이자 명문 관료 집안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가난하게 살며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혁명의 길을 간 독립운동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으며 지배하지도 않는 이상적 공동체 사회를 꿈꾸었으며, 누구보다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아나키스트이자 역사가였던 신채호, 의열단 비밀 참모 류자명,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 대표 백정기 등과 교류하며 그들의 동지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인물.


그래서 독립운동의 한 줄기인 아나키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인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도 임시정부의 노선과 공산주의 운동을 모두 비판하며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길을 간 인물, 그래서 그런지 해방 후 남북 양쪽에서 비주류로 외면당하며 잊힌 인물, 우당 이회영.


이회영과 그의 집안    

21세기, 200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이름과 그 집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집안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삼한갑족(대대로 문벌이 좋은 집안)으로 불리며 조선 왕조에서 6명의 정승과 숱한 고위 관료를 배출한 집안, 오늘날 명동 성당의 바로 건너편에 터 잡고 살아온 대부호 집안임에도 집안의 모든 부와 특권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조선 말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 6형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여섯 명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가을 어느 날 형제간 합의에 의해 독립운동을 결정하고 집안 재산 전부를 처분한 다음 만주로 집단 망명을 떠났다.


그들이 급하게 재산을 처리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했는데도 약 40만 원을 모았고, 이를 모두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사용했다. 지금 가치로 치면 약 600억원 이상(제 값대로 받았다면 약 2조 원 정도). 이 자금은 만주 한인촌 건설, 독립군 양성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건설과 유지비에 들어갔다.


이 집안 집터였던 명동 땅의 현재 경제적 가치만 생각해도, 그저 일제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집과 재산만 지켰어도 지금 얼마나 부자 집안이었을까 싶다. 이것들을 그렇게 '쉽게' 버린 다음 기약 없는 독립의 희망을 품고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게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생각이야 쉽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하여간 망명 후 35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고 1945년 해방되었을 때 6형제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이시영 한 사람 뿐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부통령이 되었지만, 1951년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자진 사퇴했다.


이회영의 손자 중 한 명인 이종찬은 육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1980년대 여당인 민정당 국회의원과 사무총장을 지냈는데, 후에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 명칭을 바꾼 국가정보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역시 손자인 이종걸은 인권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으로, 2000년 이후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원내대표를 지냈고, 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다.


이 시대에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거물급 정치인을 배출하고 있으니, 여전히 명문가이긴 한 것 같다.

명동문화공원과 이회영 생가터
         

서울 시내 중심부 명동, 여전히 사람 많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동네이다. 명동사거리 도로에서 명동 거리로 접어들면 왼쪽 언덕 위에 명동 성당이 바로 보이는데, 이 명동성당 앞에 명동문화공원이 있다.


최근에 조성한 2117㎡의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이곳이 명동 땅이라는 걸 생각하면 절대로 좁은 공간이 아니다. 병풍처럼 세워진 벽에는 명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안내하는 설명문과 사진들이 붙어 있다. 그 중에 이회영, 이시영의 사진과 이회영 집안에 대한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짧은 글이지만, 이렇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졌다는 자체가 고맙다.


이회영이 살았던 집터는 명동 거리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우측으로 꺾어진 다음 그늘진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는 곳인데, 지금은 서울YWCA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을지로로 연결되는 이 작은 골목길을 명동 11길이라 부르다가 2017년 중구청에서 명예 도로 '우당 이회영길'로 새롭게 공고하였다.


YWCA 건물 옆 거리 한 자락에 이회영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석과 이회영 흉상이 있다. 표석에는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에 이회영과 이시영에 대한 간략한 안내가 서술되어 있다.


이회영은 이곳에서 1867년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회영이 태어나 성장했던 시기에는 이 일대 땅들이 거의 이 집안 땅이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시내의 중심가는 아니어서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섞여 있는 외곽의 동네였고 드문드문 빈 터들이 있었다. 이 집안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떠나지 않고 그냥 이 동네에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니, 그들의 희생이 더 고귀하게 느껴진다. 


이회영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전통의 양반 명문가 집안 자식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했다고 한다. 자기 집안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 주고 남의 집 종에게도 높임말을 썼다는데, 지금이야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어서 비판도 많았다고 한다. 청상과부가 된 자기 여동생을 거짓 장례를 치러 죽었다고 소문낸 후에 조용히 재혼을 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명문 재상가 자식치고는 꽤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바로 옆에 이회영 흉상이 있다. 2014년 2월 24일에 세워졌는데, 이 작은 공간에 흉상 하나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금싸라기 명동 땅이라서 그랬을까. 우당기념사업회의 끈질긴 노력이 중구청의 예산 지원과 YWCA의 부지 제공으로 이어져 결국 흉상이 만들어졌다. 다행한 일이다.
         

흉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사진을 참고로 하여 흉상을 만든 것 같다. 강단이 있는 혁명가였지만, 사진으로 본 그의 얼굴은 명문 부잣집 도련님답게 매끈하고 잘생겼으며 어딘지 품위도 있어 보였다. 흉상에도 그런 느낌이 있으며, 착각일지 모르지만 약간의 웃음기조차 있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국왕 선조를 끝까지 호위하여 공신이 된 그의 직계 선조 이항복의 인상 때문일까. 어릴 때부터 장난기와 농담이 심하고 조정에서도 그 성격을 감추지 않았던 오성 대감 이항복. 그래서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양반 아들의 이야기가 설화의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아나키스트로 평생 이회영을 따랐던 이정규의 증언에 보면, "선생은 소탈하고, 극히 평민적이며, 인정이 많았다. 대인관계에서도 관용과 포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반면 강정(强情)에 가까운 고집이 있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다"라고 한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인물이다. 사실 필자는 그의 활동과 이력보다 그의 이런 측면에 더 마음이 간다. 엄혹한 시대, 굶주림과 가난, 죽음을 넘나들며 오로지 독립과 혁명의 신념을 간직하고 치열하게 살면서도 그런 인격을 가졌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천성적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남을 이끌기보다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남을 억압하거나 강제로 이끌고 가지는 않은 인물. 그 어떤 종류의 억압도 반대했던 그의 입장은 그의 천성에서 온 것 같다. 


우당기념관에서 보는 이회영


"본래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따로 만들려고 했는데, 영 여의치 않은 데다 지원도 받지 못해서 아예 이종찬 전 의원이 자기 집 1층에 기념관을 만들었지요." 


우당기념관에 가면 방문객들에게 기념관을 소개하고 이회영과 그 집안에 대해 간단하게 안내하는 분이 있다. 이 분 말에 의하면 우당기념관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의원이 사비를 들여 만든 곳이다.


새삼 밖으로 나와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종찬 전 의원, 이분 집이 꽤 큰 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국가나 지자체에서 어디 한 군데에 좀 번듯하게 만들어 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국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니니 이렇게 아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안내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우당기념관은 서촌에 있다. '서촌'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들은 안다. 공식적인 행정구역이 아니라,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촌이다. 상대적으로 경복궁 동쪽에는 '동촌'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북촌 한옥마을로 불린다.(흔히 종로 북쪽이라 북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꽤 유명한 명소 북촌 한옥마을의 뒤를 이어 이제 서촌마을도 외부인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많아져서이다. 서촌의 한옥들과 음식점들, 거리 풍경들이 '핫 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차츰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서촌마을을 지나 북쪽의 필운대로 한적한 주택가에 우당기념관이 있다. 넓은 의미의 서촌에 해당되지만, 이 일대로 관광하러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당기념관은 조용하다.

내부에 들어가면 전체 모양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시관은 우당 이회영의 생애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자료와 안내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가 주도한 6형제 회의, 그리고 재산 처분과 집단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과, 그 가운데에서 만나고 같이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이 같이 소개되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중간 중간 집안에 내려온 자료들도 제법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1962년의 건국공로훈장증과 2000년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혁명열사증명서가 눈에 띈다.


우당기념관을 돌아보면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박물관도 자료와 유물을 순서대로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닌, 멀티미디어와 다양한 시청각 수단을 동원하여 전시하고 입체적으로 꾸며놓는다. 체험 공간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아무래도 개인이 만든 기념관의 한계가 뚜렷하다. 이 공간이라도 있다는 것이 고맙지만, 좀 더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 국내 우익 계열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였던 이상재의 말마따나 '우리 민족은 우당 가문에 큰 빚을 졌다. 해방이 되면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조선 10대 부자 집안임에도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재산을 몽땅 털어 재산 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집안,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신념과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집안.


가진 것이 많았기에 잃은 것도 많았지만,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의연히 살아간 집안. 그런데 옛날 집터에 흉상 하나 설치하는데도 많은 난관을 뚫어야 했고, 국가가 제대로 된 박물관 하나 지어주지 못한 현실을 보며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회영에 대한 책을 읽고 자료를 검토한 후 그의 흔적들을 찾아가면 갈수록 부끄러운 마음만 늘 뿐이다. 그래서 이회영의 흔적을 찾아가는 답사는 단순한 역사 인물 답사가 아니라, 나와 우리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부끄러운 답사이다. 

그가 남긴 시를 다시 생각한다.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히 몰아치는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 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그의 나이 30이 되던 1897년 <독립신문>의 어느 사설을 읽고 가슴이 끓어올라 지은 시, <소년 30세시>.

그의 삶을 생각하며 고민해 본다. 이 한 번의 인생을 어찌할 것인가.


우당기념관 답사 정보


주소: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10길 17


관람 시간: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 토요일 오전 9시~오후 3시,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무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서 보이는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 마을버스 어느 것이나 오는 대로 타고 가다 효자동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정류장 앞 횡단보도를 건너 약 250m 올라가면 우당기념관에 닿는다. 
경북궁역에서 천천히 걸어가면 20~30분 정도 걸린다.

* 이회영과 이 집안 사람들의 간략한 일생은 우당기념관 입구에 있는 안내문의 글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우당 선생 6형제와 가족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막대한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한 후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무장 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중국에서 아나키즘 운동과 비밀 결사 다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방면의 조직을 통해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당 선생을 비롯해 많은 분이 중국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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